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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Interface Guidelines/기타

번역의 기준

by jum0 2020. 6. 17.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번역과 동시에 기존에 깃허브에서 번역했던 문서들을 옮기고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과 더불어, 이전에 했던 번역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중간중간 나름 '재번역'하기도 했다.

 

번역과 재번역을 진행하면서 새롭게 생각해본 부분은 '기준'이다.

나에게 번역이란 '해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만만하게 여기는 생각조차 없었다.

이렇게 시작했기에, 다양만 문제들을 마주했다.

 

원문을 어느 정도까지 풀어써야 하는지, 독자에게 원활한 정보 전달을 위해 번역의 수준은 어느 정도로 설정해야 하는지, 영어가 더 익숙한 단어일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다양한 문제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영어로 된 문서를 한글로 번역했지만 정작 중요한 핵심이 되는 개념이나 키워드들은 원문 그대로 쓰기도 했다.

또, 기분에 따라 직역과 의역을 넘나들기도 했다.

의역이 독자에게 좀 더 친절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원문을 내 마음대로 가공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어 기준을 세울 수가 없었다.

 

기존의 이런 문제점들을 고치고자 스스로 기준을 세웠다.

'한 때' 지켰던 기준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여러 문서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은 단어들이 있기는 했지만 새로운 단어가 계속 등장했고, 같은 단어라도 맥락에 따라 다르게 쓰는 게 이해를 돕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었다.

그래서 번역과 관련된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번역을 업으로 삼고 계시는 분들은 어떤 생각과 기준을 갖고 계시는지, 내가 마주한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는 두 권의 책을 알게 되었다.

 

'번역은 글쓰기다'는 독해와 번역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추천할만하다는 말에, '번역의 탄생'은 번역가 지망생의 스테디셀러라는 말에 선정했다.

 

<번역은 글쓰기다>

이 책의 핵심은 '원문보다 아이디어의 번역'이었다.

저자는 어구와 문장에 집중하는 미시적인 방법보다 글쓰기에 집중하는 거시적인 방법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번역가의 자유와 의무는 '원문의  흐름과 뜻을 잘 전달했는가'로 최종 판단해야지, 원문에 없는 것을 넣었다 혹은 있는 것을 뺐다는 기계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즉, 저자는 직역보다는 문장 전체의 아이디어를 살린 의역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양한 번역을 경험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저자의 주장과 그 이유에 대해 납득이 되었기에, 내가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리 깊게 고민했던 문제가 아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번역가들 사이에서는 큰 논쟁 거리였다고 느껴졌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원문파, 자유파, 중도파가 있는데, 원문파는 원문의 난이도, 문장의 구조, 마침표의 개수까지 동일하게 번역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자유파는 독자를 중심으로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며, 중도파는 말 그대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번역가들이다.

원문을 있는 그대로 살리고 싶은 태도에서 나온 원문파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지만, 독자를 중심으로 한다는 자유파의 표현에서 이미 나는 넘어가고 말았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 살짝 맹목적인) 사용자 중심의 입장을 취하는 나에게 독자 중심이라는 말에서 내 입장은 정해졌던 것 같다.

글이 약간 흐려졌는데, 다시 돌아가서 내가 고민했던 문제의 원문은 어느 정도까지 풀어써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독자를 중심으로 이해하기 위해 쉽게 정도가 될 것 같다.

사실 더 깊이 파고들면, '쉽다'라는 기준은 무엇인가 등 끝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는 핑계로 발을 빼고 싶다.(무책임한 것 같기는 하다..ㅠ)

그래도 이 책을 통해 가끔 의역을 하며 원문을 너무 내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번역이라는 과정은 또 하나의 내 글이 탄생하는 일종의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탄생>

책을 읽으면서 아차 싶었다.

번역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민했던 문제들이 번역과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원문(이하 출발어)과 번역문(이하 도착어)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이 필요했지만 알지 못했다.

번역다운 번역을 위해서 출발어와 도착어의 언어적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직역주의와 의역주의가 나오게 된 배경을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책 속에 있는 예시들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 같았다.

동적인 언어인 한국어만의 특색을 살려 다양한 예시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몇 가지 예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A careful comparison of them will show you the difference."

"그것들의 자세한 비교는 차이점을 드러낼 것이다." 보다는 "그것들을 자세히 비교하면 차이점이 드러날 것이다."와 같이 써주는 게 좋다.

영어는 명사의 비중이 높은 언어라 형용사의 비중이 높은데, 한국어는 동사의 비중아 높아 부사의 역할이 크기 때문에, 후자와 같은 번역이 한국어를 더 한국어로 드러내는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Human Interface Guidelines를 번역하면서 자주 마주했던 수동문에 대한 방향성도 찾을 수 있었다.

The concrete slabs represent the millions of Jewish people killed by the Nazis during World War II.

저자는 '콘크리트 덩이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게 죽임을 당한 수백만의 유대인을 나타낸다.' 라는 표현보다는 행위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콘크리트 덩이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손에 죽은 수백만의 유대인을 나타낸다.'라고 표현하는 게 수동의 뉘앙스를 잘 전달한다고 말했다.

즉, 핵심은 한국어의 자동사를 잘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고민하는 문제의 답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인식조차 하지 못한 문제를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많이 배웠던 책이다.

가장 한국어다운 번역을 목표로 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던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다.

그럼 다시 목표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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